해안스님─마음은 정하여진 바 없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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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진제사 댓글 0건 조회 240회 작성일 14-06-04 15:05본문
마음은 정하여진 바 없다
해안스님
세상에 오고 가는 일이 다 인연이 있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.
내가 여러분을 만나게 되는 것도 속세(속世 : 前生의 세상)에 인연이 있어
금생에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.
이 말은 세상의 모든 일이나 만물이 아무 때나 무질서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.
생겨날 인(因)과 연(緣)의 상대가 서로 결합하여 나고 변화하는 질서를 말하는
뜻입니다.또 잘 살고 못 사는 현실이 다 속세로부터 연속되는 인과(因果)의 원인이
있는 것입니다.
불교는 이 인과를 알고 인과의 주인공인 자기 마음을 알아 그 마음을 잘 쓰는데 있는 것입니다. 다시 말하면 자기의 근본과 현실의 원인을 깨달아 잘 살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마련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.
불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처의 본심을 알려고 하는 것이고, 부처의 본심이 곧 자기의 본심을 뜻하는 것입니다.
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의 본심이 둘이 아닌 하니인 것입니다.
만물에는 상대의 근본이 둘이 아닌 하나의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.
비유하면 파도치는 물의 그 모양은 여러 가지로 일어나지만 파도 속에 젖는
물의 성질이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.이와 같이 만물은 모양은 다르지만 그 모양 속에는 하나의 불성 자리가 있는것입니다.
이 불성 자리가 우주의 근본으로서 마음이니 불성이니 여러가지 대명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. 일체 언어 동작이나 만유(萬有)에는 이 불성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.
이 불성은 아주 멀리 크게 다 있을 뿐 아니라, 가깝게도 있기 때문에
또 대소 유무(大小有無)를 초월한 근본 자리이면서 일체 사물에 현현하게 나타나는 묘유(妙有)한 것이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것입니다.
사람이 먹고 자고 일하는 일체 마음 그대로 불성이 있는 것입니다.
세계 삼대 거사(三大居士)의 한 사람인 중국의 방거사(龐居士)는
[불법이 어렵고 어렵다.마치 아주까리 씨를 거꾸로 백천개를 올리는 것처럼
불법이 어렵다]고 했습니다.
그때 방거사의 부인은 불법이 아주 쉽고도 쉽다고 하면서
[마치 일백초두(一百草頭)에 조사의 뜻이 있다.]고 했습니다.
즉 일체 만유에 다 불법이 있는데 어려울 것이 무어냐고 했읍니다.
또 방거사의 딸은 [불법이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으며 어렵고 쉬운,
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그대로 일체가 불법이다] 했습니다.
한 생각이 나기 이전의 불성 자리는 유무의 상대가 없는 자리이면서
곧 한 생각을 일으켜 일체 상대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.
그러므로 유(有)도 아나고 무(無)도 아닌 불성을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.
이 불성이 용(用)으로 일어나는 것이 곧 불법입니다.
즉 체(體).용(用)을 바로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.
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불하여 성불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것이 아니고
다시 중생의 몸으로 화신(化身)하여 보살행을 한 것입니다.
우리 중생은 대소 유무의 모든 상대에 걸려 있는 병자(病者)로 비유하면
보살행은 일체 상대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행입니다.
불법은 한 물건도 취하지 않는 것이고, 동시에 한 물건도 버리지 않는 것이
불법입니다.
석가모니 부처님이 49년간 설법하고 한 마디의 설법도 한것이 없다고 했습니다.
이 말은 본래 청정한 불성 자리 즉 한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본 마음 자리에 입을 열어 말을 한들 무슨 필요가 있는 일이며 도리어 불성 자리를 더럽히는 것을 뜻하는
것입니다. 그러나 또 말 없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.
마음, 즉 불성 자리는 본래 정한 바가 없습니다.
그러므로 일어나던 생각을 금방 취소할 수도 있고 유무의 상대가 이 자리에서
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. 설법을 했다고 정할 수도 없는 것이 불법입니다.
즉 아무도 설한 것이 없는 것이 불법이라고 정하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.
해안스님
세상에 오고 가는 일이 다 인연이 있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.
내가 여러분을 만나게 되는 것도 속세(속世 : 前生의 세상)에 인연이 있어
금생에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.
이 말은 세상의 모든 일이나 만물이 아무 때나 무질서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.
생겨날 인(因)과 연(緣)의 상대가 서로 결합하여 나고 변화하는 질서를 말하는
뜻입니다.또 잘 살고 못 사는 현실이 다 속세로부터 연속되는 인과(因果)의 원인이
있는 것입니다.
불교는 이 인과를 알고 인과의 주인공인 자기 마음을 알아 그 마음을 잘 쓰는데 있는 것입니다. 다시 말하면 자기의 근본과 현실의 원인을 깨달아 잘 살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마련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.
불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처의 본심을 알려고 하는 것이고, 부처의 본심이 곧 자기의 본심을 뜻하는 것입니다.
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의 본심이 둘이 아닌 하니인 것입니다.
만물에는 상대의 근본이 둘이 아닌 하나의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.
비유하면 파도치는 물의 그 모양은 여러 가지로 일어나지만 파도 속에 젖는
물의 성질이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.이와 같이 만물은 모양은 다르지만 그 모양 속에는 하나의 불성 자리가 있는것입니다.
이 불성 자리가 우주의 근본으로서 마음이니 불성이니 여러가지 대명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. 일체 언어 동작이나 만유(萬有)에는 이 불성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.
이 불성은 아주 멀리 크게 다 있을 뿐 아니라, 가깝게도 있기 때문에
또 대소 유무(大小有無)를 초월한 근본 자리이면서 일체 사물에 현현하게 나타나는 묘유(妙有)한 것이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것입니다.
사람이 먹고 자고 일하는 일체 마음 그대로 불성이 있는 것입니다.
세계 삼대 거사(三大居士)의 한 사람인 중국의 방거사(龐居士)는
[불법이 어렵고 어렵다.마치 아주까리 씨를 거꾸로 백천개를 올리는 것처럼
불법이 어렵다]고 했습니다.
그때 방거사의 부인은 불법이 아주 쉽고도 쉽다고 하면서
[마치 일백초두(一百草頭)에 조사의 뜻이 있다.]고 했습니다.
즉 일체 만유에 다 불법이 있는데 어려울 것이 무어냐고 했읍니다.
또 방거사의 딸은 [불법이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으며 어렵고 쉬운,
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그대로 일체가 불법이다] 했습니다.
한 생각이 나기 이전의 불성 자리는 유무의 상대가 없는 자리이면서
곧 한 생각을 일으켜 일체 상대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.
그러므로 유(有)도 아나고 무(無)도 아닌 불성을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.
이 불성이 용(用)으로 일어나는 것이 곧 불법입니다.
즉 체(體).용(用)을 바로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.
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불하여 성불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것이 아니고
다시 중생의 몸으로 화신(化身)하여 보살행을 한 것입니다.
우리 중생은 대소 유무의 모든 상대에 걸려 있는 병자(病者)로 비유하면
보살행은 일체 상대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행입니다.
불법은 한 물건도 취하지 않는 것이고, 동시에 한 물건도 버리지 않는 것이
불법입니다.
석가모니 부처님이 49년간 설법하고 한 마디의 설법도 한것이 없다고 했습니다.
이 말은 본래 청정한 불성 자리 즉 한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본 마음 자리에 입을 열어 말을 한들 무슨 필요가 있는 일이며 도리어 불성 자리를 더럽히는 것을 뜻하는
것입니다. 그러나 또 말 없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.
마음, 즉 불성 자리는 본래 정한 바가 없습니다.
그러므로 일어나던 생각을 금방 취소할 수도 있고 유무의 상대가 이 자리에서
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. 설법을 했다고 정할 수도 없는 것이 불법입니다.
즉 아무도 설한 것이 없는 것이 불법이라고 정하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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